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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광기 컨트롤

썰팔이 블로그 2019. 12. 26. 19:40

살면서 그런 적이 간혹 있었는데, 귀신에 홀린듯이 뭔가를 쏟아놓을 때가 몇 번인가 있었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내가 스무살에 대학 가기 전, 작은 출판사에서 알바 할때인데.. 전단지 종이를 무게로 재서 발송하는 일을 했었다. 근데 몇 번인가 손을 왔다갔다 해 보니 더욱 최적화 더욱 최적화 하게 되어서, 일을 받으면 후루루루룩 해서 끝내고 후루루루룩 해서 끝내고 그랬다. 와 얘 일 잘한다. 사장님이 칭찬을 많이 해줬다.

 

또 종이로 인쇄된 판매처 주소를 컴퓨터 주소록에 하나하나 입력하는 일을 받았는데, 그때는 프로그래밍 그런거 배운 것도 아니었고, 또 무슨 주소관리 전용 솔루션을 쓰는 거라서, 한칸한칸 입력해야만 했고 자동으로 붙여넣거나 할 수는 없었다. 사장님이 보니까 며칠 걸릴테니 다 끝나면 알려달라길래, 나는 알았다고 하고 샘플 몇 개를 갖다가 하나하나 넣어봤다. 몇 개인가 넣어봤더니 나머지는 전부 내용만 다르고 다 똑같이 입력하면 되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빈 종이를 꺼내서 내가 순서대로 눌러야 하는 키보드 버튼을, 그러니까 철권게임 기술표 그려넣듯이, 오른쪽 화살표 몇 번, 탭 몇 번, 주소 입력, 왼쪽 화살표 몇 번, 엔터, 뭐 그런 식으로 적은 다음에, 모니터 화면을 안 보고 종이만 보면서 키보드를 두들겨 반나절만에 전부 다 집어넣었다. 와 얘 일 기똥차게 한다. 사장님이 칭찬을 더욱 해줬다. 

 

군대에 갔다. 서울공항 변전소에서 수변전설비를 관리하는 병사로 근무했다. 커다란 두꺼비집이라고 보면 되는데, 2만2천볼트짜리라는것 빼고는 그냥 켜고 끄는 것만 관리하면 되는 일이었다. 지키고 있다가 순간 정전이 나면 달려나가서 버튼 누르고 정전 났었다고 보고서 써 올리고 그게 다였다. 거기 앉아있다가 보니 이건 뭐지 저건 뭐지 궁금하길래, 뚜껑도 열어보고 조심조심 버튼도 몇개 눌러보고 그러다가 내가 정전도 몇 번인가 시키고 그랬다. 그렇게 눌러보다 보니 이 공항 어디 건물로 어느 라인이 뻗어서 가는지 알게 되고, 전력계통이 어찌 되는지도 알게 되고, 재밌네 하다가 중대장 앞에서 몇 마디를 뱉었더니 와 얘 이런걸 아네 그래서 칭찬을 많이 받았다. 변전소를 새로 지을 때 내가 간섭도 많이 해서 새로 지은 변전소를 통째로 내가 맡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는 심심하니까 VBA프로그래밍을 해서 사병들 휴가계획표도 만들고, 주위에 목재창고가 있었는데 나무를 두들겨서 공구통도 만들고 그랬다. 공군 기지는 활주로를 따라 길게 늘어져있어서 자전거를 타고 왔다갔다 했는데, 남들이 전역하면서 내버리고 간 자전거들 주워다가 새로 조립해서 친구들 나눠주고 나도 타고다니고 그랬다. 전기제초기를 만들어보겠다고 안쓰는 선풍기를 뜯어다 모터를 떼내서 놀기도 하고, 나무질도 하고 시멘트질도 하고, 손에 닿는대로 뭔가를 만들고 다녀서, 작업이 있을 때마다 인정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몇 번인가 비슷한 감정이 들 때가 있었는데, 일터 말고 학교에서는 그럴 일이 별로 없었다. 과제 내고 시험보고 그게 전부였으니까.

 

또 한번은 호주에 가서 청소부를 할 때, 불판닦는 일을 할 때, 그때는 뭘 만드는 일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주어진 일을 미친듯이 해서 칭찬을 많이 받았다. 청소 설거지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디테일하게 손대면 할일도 무지 많고 결과물의 퀄리티도 남들과 다르게 내놓을 수 있다. 

 

그 다음에는 한페이지 머신러닝.. 구글슬라이드로 그림을 그리는데, 화면을 200%로 확대해서 픽셀 하나하나까지 다 맞춰서 그리는게 재미있었다. 양도 많았고 퀄리티도 좋게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강의평가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다음에는 광인 사건.. 블로그 글을 쓰는데 뭐에 홀린듯이 하루에 네다섯편씩 장문의 블로그 글을 쏟아내어서..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내가 겪었던 것들은 전부 다른 일들이지만 공통점이 있는데, 뭐에 홀린듯이 마구 쏟아내는 경험, 마라톤에서 말하는 runner's high라고 할지.. 몸도 정신도 힘이 드는데 멈추지를 못하고 계속 일하는 현상을 종종 겪었다. 광기라고 불러야 할지 그런 면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또 정반대의 일도 있었다. 일을 받아서 아예 손도 안 대고 말아버렸던 경험들. 세계여행을 다녀와서 어떤 스타트업에 면접을 보고 문제를 하나 받아서 왔는데, Spark로 regression을 해서 뭔가 하는 거였다. 어찌어찌 하면 할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집에 와서 펼쳐보고 몇 번인가 만지작거리다가 빈 파일을 전송하고 끝내버렸다. 그 스타트업 대표님은 나의 그런 태도에 화를 많이 냈다. 나도 미안하고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정말로 못하겠어서 그렇게 성의없이 굴었다.

 

그러고 나서 다른 스타트업 두 군데를 개발자로 들어갔는데, 한 군데서는 열흘, 또 한 군데서는 한달 반을 있다가 못하겠다고 나와버렸다. 그때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정말로 못하겠어서 그렇게 성의없이 있다가 나왔다. 

 

나는 어떨때는 미친듯이 일을 해서 결과를 만들어내는데, 또 어떨때는 일을 아예 안 하고 너무 성의없이 굴어서 다 망쳐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연구에서 후자의 감정이 들어서, 지금 고민이 많이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10%도 안 하고 있어서, 교수님이 실망을 많이 했고, 나도 나에게 많이 실망스럽다. 

 

내가 왜 그러는지, 어떻게 하면 다시 힘이 나서 일을 할 수 있을지를 나도 모르겠다. 광기 컨트롤이라고 해야 할지, 어떨때는 미쳐서 일을 하는데 어떨때는 무책임하게 다 놓아버리는 식이라서.. 내가 나를 아직도 잘 모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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